묵상자료(2011.10.20. 목) <이게 진짜 복입니다>
이 묵상자료는 매일 게제됩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10월 20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Thu, 20 Oct 2011 00:17:29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808호(2011.10.20. 목요일) 시편 102:01∼05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성경 마태복음 5:01 ∼ 10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찬송 516장 < 맘 가난한 사람 > 위 찬송을 직접 듣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시고 http://www.holybible.or.kr/HYMN/cgi/hymnftxt.php?VR=HYMN&DN=516&QR 새로 열린 창 오른 쪽에 "♪오디오찬송"을 클릭하세요. 악보도 함께 보시려면 "♪오디오찬송" 바로 옆에 있는 "♬악보"를 클릭하세요. 제목: 이게 진짜 복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수많은 결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결정은 좋아서 기꺼이 선택하는 것도 있지만, 또 어떤 결정은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그래서 더 잔인하고 힘겨운 결정도 있지요. 1884년에 쓰여진 플랑크 스톡톤의 동화 <미녀일까 호랑이일까>는 잔인한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속 공주는 사랑하는 남자를 공개재판에 보내놓은 상황입니다. 아버지인 왕이 딸과 사랑에 빠진 이 평민 청년을 괘씸하게 여겨서 그를 원형 경기장에 끌고 왔지요. 경기장의 두 문에는 각각 굶주린 호랑이와 아름다운 어떤 여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년은 어느 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지요. 만약 호랑이가 나온다면 호랑이의 밥이 될 것이고, 여인이 나온다면 그녀와 결혼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그가 사랑하는 공주가 아니고,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녀였습니다. 청년을 보고 있는 공주는 문 안쪽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호랑이가 아닌 다른 문 안쪽에 있는 여인은 오래 전부터 짝 사랑해 왔던 궁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청년은 공주에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이지 애타는 눈빛을 보냅니다. 고민하던 공주는 손가락 하나를 빠르게 움직여 방향을 알려 줍니다. 청년은 확신에 차 그 쪽으로 걸어가고 마침내 문이 열립니다. 동화는 여기까지만 묘사한 후에 끝이 납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이를 호랑이 밥이 되도록 할 수는 없으니, 궁녀가 있는 쪽을 가르쳐 줬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연인을 다른 여인에게 보내야 하는 그 선택 역시, 공주에게는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일일 겁니다. 작가 스톡톤 역시 이 동화의 결말을 다섯 번이나 고쳤다고 합니다. 그만큼 쉽지 않는 선택이라는 의미겠지요. 짧은 동화 속에 던져진 열려 있는 결말이, 삶 속에서 때로 피할 수 없던 어떤 씁쓸한 순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2. 오늘 읽은 말씀은 산상수훈(마 5-7장) 중에서도 백미라고 불리는 팔복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이 구절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설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이 구절을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팔복의 말씀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대로가 아니라, 우리식으로, 조금 더 확대하면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성경해석에서도 그랬던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이 가난하면 뭔가 우리가 바라는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이란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가 지난 100여년간 줄기차게 소리쳐 온 복, 어떤 누구보다 더 잘 살고 더 부자 되고 더 출세하는 복 말입니다. 너무 원색적인 표현으로 들리십니까? 진심으로 솔직하게, 마음이 가난하다는 그것을 복으로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것이 바로 복이라고, 온유한 것이 바로 복이라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바로 복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마음이 가난해 지자고, 애통하자고, 이제부터는 온유해 지자고, 이제부터는 의에 주린 사람이 돼 보자고, 의에 목마른 사람이 되 보자고 힘 있게 권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힌두교인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부딪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고, 평생 그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비폭력의 정신과 뿌리가 여기에서 탄생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진짜 복된 사람입니다. 화평을 위해 힘쓰는 자는 정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해서 고난을 겪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바로 이런 복을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옵소서.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