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2010.12.14. 화) <마라나다>
Date: Tue, 14 Dec 2010 04:29:37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498호 (2010.12.14. 화요일)
시편 19:11-14
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본문 이사야 9:02-07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제목: 마라나다(μαραναθα)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열 한권으로 완역된 마르셀 포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물, 그리고 그 이유를 밝히는 아주 길고도 시시콜콜한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작가가 가장 열심히 찬사를 보낸 화가는, 바로 풍속화가 샤르댕입니다. 샤드랭은 <깨어진 접시>, <반쪽만 남겨진 빵덩어리>, <사과나 배의 정물화>를 아주 치밀하게 그려낸 화가였지요. 이런 포르스트는 샤르댕은 배 한 알이 여자만큼이나 생명으로 가득할 수 있고, 물 단지가 보석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라고 평을 남겼지요. 바로 이런 찬사 때문에 그의 책을 읽고나면, 샤르댕의 그림들을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을 놓고 보면 그냥 일상적인 풍속화여서 좀 실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미술사를 놓고 샤르댕이 활동하던 그 시절을 짚어본다거나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립 미술관 전시품을 한번쯤 쭉 둘러 보고나면, 그 실망을 곧 찬사로 바뀔 수밖에 없지요. 1648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됐을 때, 소재에 따라서 회화의 등급을 나누는 제도가 함께 마련이 됐는데요. 이 등급표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신화나 또 성서의 세계를 표현한 역사화, 그 다음 단계가 왕과 왕비 귀족들의 초상화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세 번째가 풍경화 그리고 가장 지위가 낮은 그림이 바로 풍속화였지요. 그래서 런던이나 파리의 박물관에 가 보면요, 수많은 신화 역사를 담은 그림과 초상화들 같은 1순위 2순위 그림들 때문에, 몸보다 눈이 먼저 지쳐버리곤 하지요. 하지만 그 속의 드문드문 만날 수 있는 소박한 풍경화나 풍속화로 시선을 돌릴 때면, 커다란 위로마저 받을 수 있습니다. 첩첩히 쌓여 전시된 영웅과 신화 여러 왕과 왕비들의 초상화 사이에 걸린, 그 시대의 소박한 풍속화도 질그릇과 빵 한 덩이 꽃 병속의 꽃 몇 송이 그림은, 우리에게 휴식과도 같습니다. 모두가 위대한 1순위 그림을 향해 질주할 때, 혼자 고요히 자신의 시대를 정직하게 담아낸 이 화가의 고요한 마음과 그 고집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12월 2일 방송>
2. 며칠 전에 인문학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유형의 가치에 몰두해 있는 우리들에게 무형의 가치를 다시금 눈 뜨게 해 주는 인문학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하던 일을 조용히 돌아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질문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통스러운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추하고 어리석은 욕망덩어리들인 인간에게는 파국 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곁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여전히 힘자랑 돈 자랑 밖에는 할 줄 모르니 말입니다.
절망적인 이런 세상에(“흑암에 행하던”, “사망의 그늘진 땅에”), 전혀 뜻밖의 희망이(“큰 빛을”, “빛이 비치도다”) 찾아든 것입니다. 이사야선지는 그 큰 빛을 하나님이 보내신 “한 아기”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가진 자나(어깨에 맨 정사), 평강의 왕으로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왕이 오셔서 우리 사는 세상을 전혀 새롭게 통치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여러분들에게 절망과 슬픔이 사라질 지어다, 아멘. 어느 수요기도회를 마친 후 한 권사님이 “마라나다가 무슨 말 이예요.” 라고 물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고전 16장 22절에 나오는 구절로, 계시록 22:20에는 헬라어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종종 해석에 어려움을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라나다는 두 글자의 합성어로 마란(μαραν-우리 주)과 아다(αθα-오셨다 혹은 오시옵소서)로 구성된 말입니다. 고전에서는 완료형(오셨다)로, 계시록에서는 명령형 혹은 기원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