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묵상자료는 매일 게제됩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5월 7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Mon, 07 May 2012 02:13:27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4008호(2012.05.07. 월요일)

시편 148:1620

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18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9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20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 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찬송 295장 < 후일에 생명 그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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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메멘토 모리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남 신안과 담양, 충남 예산, 경기도 남양주, 경북 청송, 이곳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산 좋고 물 좋다, 물론 맞고요.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슬로우 시티(slow city)라는 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쩍 많이 들리는 슬로우 시티, 어떤 곳일까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됐고요. 공식 명칭은 치타 슬로우.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전남 신안군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우 시티로 선정됐는데요.

심사조건이 꽤 까다롭습니다.

슬로우 시티 국제 연맹이 직접 실사해서, 모두 24개의 항목을 심사하는데,

특히 다섯 개 핵심 항목을 집중적으로 검토합니다.

인구 5만 명 이하의 중소도시에,

자연과 생태계가 철저히 보호돼 있어야 하고,

전통 문화 유산도 잘 보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 유기농법으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하고,

대형 마트나 패스트푸드점은 없어야 하지요.

또 한 번 슬로우 시티라고 선정됐다고 끝이 아니라, 4년마다 재심사를 하는데,

이런 까다로운 심사 조건을 거쳐서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모두 10개 도시가 슬로우 시티로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역설적이게도 정작 슬로우 시티가 필요한 사람들은,

슬로우 시티와 먼 곳에 살고 있다는 점이지요.

심각한 교통 체증과 패스트푸드, 빨리빨리는 버리고, 느리고 여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은,

서울 같은 대 도시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간절하니까요.

그런데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도 비슷했습니다.

나폴레온 3세의 지시를 받은 오스만 남작은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을 벌였고,

하루가 달리 파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증기기관차의 시대가 열리면서 파리 재개발이 끝나갈 즈음이던

1870년 프랑스의 철도망은 19,200m까지 뻗어나가는데요.

기차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바로 파리지앵.

그들은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로 잃어버린 향수를 채우려고 이 기차를 타고 근교로 나갔는데,

가장 많이 간 곳이 아르장트유였습니다.

이 아르장트유를 배경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 인상파 화가는 모네였지요.

그곳의 아름다운 전원에서 햇볕을 쬐며 산책을 하고 뱃놀이를 하는,

파리지앵들의 여가생활을 많이 그렸습니다.

모네는 또 힘차게 연기를 내 뿜는 증기기관 기차도 많이 그렸는데요.

글쎄요. 언뜻 생각하면 참 모순되는 소재지요. 기차는 문명의 상징, 아르장투유는 향수를 상징했으니까요.

또 기차는 빠름이고 아르장트유는 느림이니까요.

하지만 기차라는 문명의 이기가 없었다면,

파리지앵들은 과연 전원을 잃어버린데 대한 향수와 또 느림의 여가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이런 아이러니는 21세기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작용합니다.

빠르고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일부러 느리고 여유로운 곳을 찾아 간다는 것.

곱씹어 생각할수록 참 모순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모순은 우리에게 답이 아니라, 사유를 요구하지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3월 20일 방송>


2. 한국 기독교회는 종말론으로 신열을 앓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때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바른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작심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고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알게 모르게

우리 한국 기독자들의 마음에도 섞여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사코 죽음을 멀리하고 싶고, 심지어 죽음과 천국이 들어가는 얘기나 찬송가를

매우 소극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죽은 자들이 먼저 재림하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 그것은 개인적으로든 우주적으로든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도 그 종말을 맞이하셨으니 저도 그럴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죽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종말현상입니다.

저는 이 개인적인 종말인 죽음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맞이할 것을 자주 말씀드립니다.

어찌보면 그 날을 향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하니까요.

날마다 저는 신문의 궂긴 소식란에 제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합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립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빈 손들고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재물도 명예도 그 분 앞에서는 지푸라기처럼 보일 테니까 말입니다.

움켜쥐고 벌벌 떠는 것들, 재능이든 능력이든 재물이든 주를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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