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또 새로운 한 주간의 시작이군요.
의미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7월 12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Mon, 12 Jul 2010 06:23:19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336호 (2010.07.12. 월요일)
시편 119:01-04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를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본문 마태복음 21:12-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掘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모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찬송 482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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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도의 자리 그리고 교회의 의미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만 한다.” 역사를 빛낸 위대한 남자와 여자들의 한 마디를 새롭게 돌아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한 마디>, 오늘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한 마디입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만 한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고린토스의 왕이지요. 그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벌을 받았습니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놓으면, 굴러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벌이었지요. 까뮈는 인간의 일상을 시지프의 반복에 비유했습니다. 어떤 노력도 다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헛되고 무의미한 반복이 인간의 일상이라는 거지요. 신의 경지를 꿈꾸지만 결코 신의 높이에 이를 수 없는 게 인간의 일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시지프와 마찬가지로 벌을 받은 셈이지요. 무의미한 반복과 끝없는 노력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벌을 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규정으로 시지프의 신화 얘기를 꺼낸 까뮈는, 글의 마지막에 그 규정을 번복합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만 한다.” 비록 올려놓으면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그래도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보다 높은 곳 신의 상태를 넘보는 노력자체가 노력의 끝없는 반복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까뮈는 오히려 절망적인 어투로 시지프의 신화를 꺼낸 게 아닐까요? 지레지치기 쉬운 계절이야말로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야말로 한층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한층 더 노력하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 [부조리]의 작가 까뮈의 한마디를 돌아보는 아침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6월 26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성전 청결> 일화(12-17절)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일화(18-19절) 그리고 <무화과나무 교훈>(20-22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대기적인 기록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예수님의 생애를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복음서들은 그 편집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이곤 합니다. 가령 오늘 본문의 경우 마가복음서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일화, <성전 청결> 일화 그리고 <무화과나무 교훈>이라는 순서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서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일화 한 복판에 <성전 청결> 일화를 배치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서가 <성전 청결>일화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일화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서가 마가 복음서를 알고서 기록했다고 할 때, 이렇게 편집을 바꾼 것은 어떤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마태 복음서를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위한 책”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마가 복음서를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으로, 누가 복음서를 기독교 신앙의 “내력”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와는 차별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마태 복음서를 읽는다면 각각의 사건이나 말씀에서 어떤 의미나 교훈을 말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성전 청결> 일화와 <무화과나무> 일화를 통해서 각각 독립적인 가르침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청결> 일화에서는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기도하는 집”임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고, 동시에 <무화과나무> 일화에서는 “기도의 능력”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체화(体化)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오히려 인간들의 행위나 공로를 쌓으려는 율법적 태도밖에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돈 바꾸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던 것이며 비둘기파는 사람들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쩌면 해 갈이 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아직 열매 맺을 철이 아닌 무화과나무를 빌어서,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 기독자들의 삶에서 기도의 자리를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화려하게 높아만 가는 교회당의 의미도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제목을 갖지 못한 물질적 풍요속의 영적 빈곤을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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