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08호(2010.06.07. 월요일)
시편 108:01-04
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본문 마태복음 12:22-32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이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곘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세간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찬송 96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위 찬송을 직접 듣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시고
http://www.holybible.or.kr/HYMN/cgi/hymnftxt.php?DN=96&FR=
새로 열린 창 오른 쪽에 "♪오디오찬송"을 클릭하세요.
악보도 함께 보시려면 "♪오디오찬송" 바로 옆에 있는 "♬악보"를 클릭하세요.
제목: 성령님을 거역하지 않기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노인과 젊은이 유령과 거인 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결국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역사를 빛낸 위대한 남자 여자들의 한 마디를 새롭게 돌아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한 마디>. 오늘은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노인과 젊은이 유령과 거인 등,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결국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이렇게 얘기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한 마디입니다. 제임스 조이시는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지요. 그의 장편 [율리시스/Ulysses]는 난해하기로 첫 손꼽힙니다. 너무나 어려워서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보다 그의 작품으로 학위를 받는 문학박사가 더 많을 정도라는 얘기가 있지요. 그럼에도 그는 20세기의 진정한 영미 문학을 시작하게 해준, 영문학 사상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집집마다 그의 소설 한 권이 없는 집이 없다고 합니다. 더블린에서는 해마다 그를 기리는 <블루스 데이> 축제로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릴 정도이지요. 하지만 정작 생전에 그에게 조국 아일랜드가 준 건 홀대와 무시였습니다. 검열에 따른 출판 금지며 소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이 고소와 고발을 해서, 그에겐 오히려 큰 상처와 좌절뿐인 조국이었지요. 때문에 그는 작가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40여년을, 유럽 각지를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건 언제나 더블린 사람들이었지요. 그는 어디서건 평생 아일랜드와 더블린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결국 우리가 만나는 건 나 자신이라고 말할 만도 했겠지요. 하지만 그 말은 타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한 예술가에게만이 아니라, 21세기 보통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한 한 마디이자 가치입니다.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결국 내 생각 내 판단에 의해서 어떤 사람인지 결정되지요. 타인이야말로 평소 내 사고방식이나 내 생각의 내용이 어떤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그러니 타인을 만나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는 셈이고요. 그러니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결국 우리가 만나는 건 나 자신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이 한마디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또 동시에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5월 9일 방송>
2. 시기와 질투, 이 감정 상태는 한편으로는 자신도 잘 할 수 있고 잘 하고 싶다는 데서 나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상대의 능력과 승리를 축하해 주지 못한다는 측면에는 매우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우리들이 성경에서 자주 만나곤 하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듯하지만, 이런 유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그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질병들이 끈으로 연결돼 있듯 묶여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귀가 어두울 때 말도 어눌해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행운아는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다 문제가 있는 헬렌 켈러와 같은 삼중고를 겪는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말하며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행운을 얻은 것입니까?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 중의 몇 바리새인들은 전혀 엉뚱하게도 궁실렁질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알세불>을 구약의 <바알세붑>에서 온 말로(왕하 1:2), 그 의미는 “집의 주인”, “파리의 주” 또는 “똥의 주”라는 뜻으로 사용하며, 상대를 경멸하려고 할 때 종종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선한 일을 형편없이 깎아 내리고 싶어 하는 동기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미운 상대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객관성을 팽개쳐 버리고 악평을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정당당한 자세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은 31절 말씀으로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거역하거나 훼방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마저 생기지 않으니 이 보다 더 큰 낭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주님 앞으로도 나아갈 수도 없거니와, 주님의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다는 진리에(고전 12:3) 눈을 떴으면 합니다.
3. 오늘 저는 모친상을 당한 동료 목사님을 문상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자료 2010. 6. 9 (0) | 2010.06.10 |
---|---|
묵상자료 2010. 6.10 (0) | 2010.06.10 |
묵상자료 2010. 6. 8 (0) | 2010.06.08 |
묵상자료 2010. 6. 6 (0) | 2010.06.08 |
묵상자료 2010. 6. 5 (0) | 2010.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