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03호(2010. 6. 02. 수요일)

시편 107:15-20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란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危境)에서 건지시는도다.

본문 마태복음 11:16-24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譬喩)할꼬?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다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저주받은 도성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으로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찬송 37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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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웃에 대한 냉담함이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어권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단어, 악마의 변호인(Evil Lawyer). 악마를 위한 변호사라는 단어는, 얼핏 돈만 많이 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은 그런 변호사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뜻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뜻밖의 유래를 가진 단어이기도 해요.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말은, 어떤 토론에서 용감하게 소수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 아무도 선뜻 말하기 힘든, 말하지 못한 얘들을 대신 나서서 해 주는 사람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말은 가톨릭교회 사제들 모임에서 유래됐다고 해요. 토론을 더 발전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사제들이 의도적으로 도입한 제도였다는 겁니다. 다 함께 모여서 성인을 지정해야 할 때, 복잡하고도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면, 몇몇 중심이 되는 사제들은 다른 사제들 몰래 몇 사람을 악마의 변호인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좀 고약한 이 이름에 맞게, 모든 일에 딴죽을 걸거나,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너무 쉽게 하나로 모여 버리거나, 급하게 혹은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갈 때, 아예 정반대되는 의견을 내서 토론장 열기를 식히거나 환기시키는 그런 역할을 했던 셈이지요. 그런 존재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제들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제기되는 반대의견 조차도 존중해 주고 귀 기울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토론은 더 신중하고도 알차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지요. 가속 페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멈춤 장치라는 걸 알았던 사람들이 실시했던 지혜로운 제도였던 겁니다. 선거철에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의견들, 너무 많은 구호들에 과민해지기 쉬운 요즘에, 그런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단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5월 28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비유>(16-19절) 와 <저주 받은 도시들 이야기>(20-24절) 가 나옵니다. 저는 첫 번째 장터에 서 노는 아이들 비유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에 눈 감고 사는 이상주의자나, 초현실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일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유는 매우 흔한 우리들 일상에서 일어나는 변변찮은 이야기입니다. 몇 몇 명의 까까머리 아이들이 새끼줄을 잡고 기차놀이를 하던 모습이나, 비석치기, 자치기, 숨바꼭질 등 여럿이 모여서 동네를 시끄럽게 하던 옛 시절을 추억해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구경하던 아이들의 놀이는 결혼식이 있고 난 뒤 열리던 피로연의 한 장면이거나, 어느 초상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순진한 아이들은 누군가 꼬마대장이 시키는 대로 잘도 따라 합니다. 그 규칙은 매우 단순합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한다고, 그리고 우는 소리가 나면 가슴을 치고 따라 울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너무도 사실적입니다. 피리 소리가 나자 춤을 추는데 정말 신이 나서 야단법석을 떱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누군가가 우는 소리를 내자 이번에는 허리를 굽히고 가슴을 치면서 우는 것입니다. 정말 슬픔에 빠진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 비유 속에는 예수님의 교육 방식대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피리를 불어대는데도 불구하고 춤추는 사람이 없고, 실제로 주검 앞에 함께 서럽게 울어주어야 하는데도, 우는 사람이 없는 그런 시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시대라고 해도 조금도 낯설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그 시대나, 우리 시대까지도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서 냉담함이라는 마음입니다. 내 떡은 내가 먹고, 네 떡은 네가 먹는 일에 훈련이 된 때문에, 개인 중심적 사고나 생활이 최고조로 발전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양분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소통부재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는 데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건, 여당과 야당 사이건,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사이건 간에, 소통부재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극단적인 대립양상을 보이는 <4대강 개발> 문제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게 그렇게도 중요하면 그럴수록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대립과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더 많은 이해를 구하는 자료와 설득하는 시간과 방법들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꼭 지금 당장 진행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밀어붙이는 게, 과연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인가 해서 말입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국책 사업이 뒤집기를 하지 않나, 아무래도 어떤 치적을 위한 공명심에서 나온 단견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지금 피리를 불고 있는지, 아니면 애곡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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