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02호(2010.06.01. 화요일)

시편 107:10-14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려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본문 마태복음 11:07-15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侵擄)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이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찬송 227장 저 하늘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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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국에서는 최소한 세례자 요한 정도는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의 시대에 보내드리는 나와 당신 우리 자신의 심리를 알면서, 더욱 행복해 지자는 <행복한 심리학>입니다.

이어령 씨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지성인 중의 한 분으로 꼽히지요. 특히 신의 존재나 권위를 앞서서 부정했던 무신론자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을 냈지요. 그리고 지성으로 중무장됐던 마음이 어떻게 종교적인 영성으로 돌아섰는지 세세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까지는 너무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딸에게 닥친 많은 시련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는 했지요. 그러나 어떻든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이 지성보다 신을 인정하는 <영성>을 택한 것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서양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종교 얘기는 금기시 하지요. 또 많은 나라들에서 종교는 때로는 화합이나 평화보다 갈등과 반목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종교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적지 않지요. 하지만 최근의 심리학은 오히려 종교적인 감정이나 깨달음으로만 치부되던 영성을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런 연구에서는 영성이라는 종교적인 단어 대신에, 자아 초월심리라는 전문용어를 쓰지요. 그런 자아 초월심리의 큰 특징은, 전통 종교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신성추구 세속적인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거부감,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원천의 추구, 자기 실현의지 라는 것들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평범하고 세속적이며 소비 향락적인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를 발견하거나 깨다는 것이 참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 70대에서야 신을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지성인도, 또 최근에 40대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는 한 시인도, 종교로서 자아초월 심리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 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5월 20일 방송>


2. “큰 자, 그러나 작은 자”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최근에는 역설의 진리를 잘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신학을 공부할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의 심중을 살필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요한 관(觀)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서 광야로 구름같이 모였던 것은, 갈대를 구경하려 함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도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고 싶어서였다고 말씀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라기서가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라고 말입니다(말 3:1). 다음으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천국에서 볼 때는 가장 작은 자라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느 것 하나 주목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저를 비롯해서 많은 설교자들은 아마도 첫 번째 말씀에 머물곤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마지막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땅에서는 가장 큰 자이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자칫 땅과 천국의 관계를 오해할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역설의 진리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어느 로마 가톨릭 학자가 쓴 주석서를 읽다가 깜짝 놀란 해석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자를 너무 극찬하신데 당황한 나머지 어록의 전승자 혹은 편집자가 세례자를 약간 격하시킨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다시금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역할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해 볼 기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길잡이로써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군중을 불러들일 수 있는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흔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이나, 사람들은 물론 당대의 최고 권력자 헤롯을 두려워 떨게 할 정도로 회개의 설교자라로써,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길잡이 역은 단 한 사람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이 인정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큰 자라는 이해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국에서는 매우 작은 자에 해당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선 이 말씀의 의도는 땅의 사람들과 천국 사람들을 단순히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 나라는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천국의 사람들은 적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나은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 속한 사람은 최소한 세례자 요한만큼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천국의 품격이 높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천국에 속한 사람은 세례 요한을 능가하는 자격과 인품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선언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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