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riginal Message ] ----------

Subject: 6월 2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Sat, 02 Jun 2012 05:18:27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4034 (2012. 06. 02. 토요일).

시편 6:04-06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본문 마태복음 10:34-42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賞)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찬송 489장 <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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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한 부정어법은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의 1920년대의 소설 [달려라 토끼] 속의 토끼는, 정말 토기가 아닙니다.

소설 속 주인공 해리가 생김새 때문에 얻은 별명이지요.

해리는 학창시절에는 농구로 유명한 스타였지만,

졸업 후에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평범한 가정을 꾸립니다.

하지만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는 아내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낍니다. 그는 말하지요.

“어느 날에서부턴가, 나는 저 아내의 풀로 붙여져 있는 것 같았어요.

수많은 망가진 장난감이며, 빈 잔과 함께 말이예요. 텔레비전은 꺼질 줄 모르고,

먹을 것은 늦게 나오거나 아예 내오질 않고,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그러다 해리는 어느 날 갑자기 빠져 나가는 게 너무나 쉽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무작정 걸어 나가면 되는 거였던 겁니다.

그렇게 집을 나가버린 해리는 일탈을 거듭합니다.

그러다 모든 걸 다 잃고 나서도 집으로부터 또 집 밖으로부터 도망치듯 계속 달리지요.

토끼처럼 달리고 또 달립니다.

19세기 윌리엄 터너의 그림 속 토끼가 새로운 문명과 겨루기 위해 달렸다면,

20세기 존 업다이크의 소설 속 토끼는 그 문명사회가 이룬 중산층의 망가진 일상으로부터

끝없이 벗어나려는 도피의 달리기였다고 할까요?

두 토끼 다 그리 행복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21세기의 토끼는 달리기의 속도를 오히려 좀 늦춰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4월 5일 방송>b.


2. 일반적으로 종교들이 표방하는 목표중 하나는 평화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치 불화와 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어서, 당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강한 부정어법은 때론 강한 긍정을 표현하려고 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든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던지

하는 말들을 따로 떼어놓고 인용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두 마디 말만을 인용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이고,

가까이 말아야 할 까닭입니다.

그런 자세는 분명히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맥락에서 이야기의 실체를 이해하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첫마디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가히 전투적인 표현입니다만, 그 속내는 전혀 다른 분명한 의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이었고,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과 짝짜꿍이 되어 산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세상과 싸우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물든 사람들과

어쩔 수 없는 진검승부를 펼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눈을 감고 평화로운 체 지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를 가려서 제자리에 놓고 살자는 말씀입니다.

질병의 원인이 되는 독한 균을 그대로 놔 둔 채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랄 순 없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은 고쳐보자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깊이 생각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3. 몽골의 동역자가 목회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어렵지만 한국교회만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 지붕을 올려보자 는 내용이었습니다.

건강한 신앙의 신호탄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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