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riginal Message ] ----------

Subject: 5월 28일 늦은 묵상자료를 아산에서 보내드립니다.

Date: Mon, 28 May 2012 06:38:25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4029호(2012.05.28. 월요일)

시편 5:0103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祈禱)하고 바라리이다.

본문 마태복음 9:27 34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 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아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찬송 528장 < 주여 나의 병든 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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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은 긍휼을 구할 때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지를 찾아갈 때와 떠날 때의 느낌은 언제나 공통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그리움입니다. 다른 점은 애잔함입니다.

그리움이란 단순히 마음과 생각을 나누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풍경만이 아닙니다.

함께 기도하고 꿈꾸는 더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점이란 찾을 때의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애잔함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에서부터,

그들이 짊어질 삶의 무게가 너무도 버겁게 느껴지는 때문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선교여행을 생생하게 스케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게 일기쓰기입니다.

너무 피곤하면 아주 간단히 적곤합니다만, 가능하면 생생한 일상을 빼곡하게 적습니다.

이번 선교 여행에서는 밤 하늘의 별들을 많이 본 것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바로 저의 게르(천막) 위에 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시골 아낙네의 눈썹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지만 그믐밤처럼 캄캄했습니다.

전혀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이들과는 손을 잡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다독여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섬겼던 교회는 울란바토르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한 교회가 불과 10년 사이에 7개 교회당과 30개의 가정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거기다 10여명의 유학생들을 한국에 보낸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베트남에 있는 저의 선교지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그 두 곳 개척자들은, 현지 교회 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에 헌신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선교 목적과 일치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저는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눈 뜨는 데만 25년이나 걸렸습니다.

선교사 자신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선교지의 지도자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선교지의 말을 배우는데 시간을 쓰지 않기로 생각했습니다.

대신에 좋은 통역자를 동역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그리고 몽골에서 그 작심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통역자들이 빠른 시간에 저를 대신하거나

저를 능가하는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늘 애잔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동역자들이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시들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아니면 경제적인 부족함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도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고, 그리고 육신을 가졌습니다.

그런 그들을 돌보는 일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버거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애잔합니다. 이번 선교 여행에서는 더욱 더 그런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 쉬고 싶어요. 하루 만이라도.” 쉼이 없어서 더욱 깊이 병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2. 예수님이 계셨던 2천 년 전의 유대 땅이나, 우리들이 사는 지금이나,

질병에 묶인 사람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어쩌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 두 사람과 벙어리를 비롯해서

셀 수 없는 환자들이 주님을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앞에 섰고, 주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는 말, ελεο(엘레오스)는

바로 우리 주님이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은혜와 긍휼(불쌍히 여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와서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그리고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는

두 손 들고 붙잡아 주시는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 병든 사람들, 제가 찾았던 몽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상들의 바다에서 정신적인 환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축귀현상이 낯설게 여겨졌지만, 제가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던 것은,

그 때 우리 사회도 귀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모래밭에서 철부지들이 뒹굴도록 방치된 장면은 흔한 모습이었습니다.

흙을 집어먹는 어린 아이들을 말리는 일이 버거운 슬픈 현실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지금 이 열악한 땅에 주님의 은총과 긍휼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3. 오늘은 저의 부친 46주기 추모예배를 아산의 저의 집에서 드립니다.

9남매가 모일 것입니다.

어린 조카 녀석 하나가 결혼할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애기를 낳았다고 가족들에게 기도부탁을 하고,

새 집을 장만했다고 축하를 받기도 할 것입니다.

추모예배는 죽은 자를 기억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 안부를 확인하고 격려하고 감사하는 기회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께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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