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묵상자료는 매일 게제됩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5월 13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Fri, 13 May 2011 00:01:07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648호(2011.05.13. 금요일)

시편 60:01-04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본문 요한2서 1:01-13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와 사랑

4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끝 인사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찬송 242장 < 교회의 참된 터는 >

위 찬송을 직접 듣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시고

http://www.holybible.or.kr/HYMN/cgi/hymnftxt.php?VR=HYMN&DN=242&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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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암흑천지였던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것처럼, 정전 중이던 대 도시의 밤중에 전등불이 일제히 환하게 켜지는 것처럼, 내 영혼에 불꽃이 타오르는 결정적인 순간. 그렇게 한번 타오른 불꽃은 아마도 꺼지는 일 없이, 계속 영혼을 밝히고 앞으로 가야할 길로 밝혀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건 시간과의 싸움에서 한 없이 약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빛과 색은 날아가 버리고, 그 형태마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요.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과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순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만, 시간 앞에서 불가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은 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미련에서 출발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보고 싶은 꿈,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망 말이지요. 그래서 예술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순간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음악가는 화성과 멜로디로, 미술가는 캔버스와 대리석으로, 그리고 시인은 언어로 말이지요. 그런데 미술사에서 그 흐름을 바꾼 화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잔이지요. 세잔은 기존의 회화들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순한 구도와 형상으로 순간의 느낌과 인생을 표현했습니다. 회화가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추상으로 진행되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었지요. 회화의 흐름을 바꿔버린 세잔, 만약에 그가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등장한 용어가 바로 <세잔 모멘트>입니다. 하지만 어디 미술사에만 <세잔 모멘트>가 있을까요? 우리의 생이라는 캔버스에도, 몇 번에 쯤은 그처럼 결정적인 순간이 그려집니다. 바로 거기에서 운명이 이루어질 것 같은 순간, 그래서 영원으로 이어질 것 같은 순간. 헝가리 작가 산드라 마라이는 [결혼의 변화]라는 소설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살다보면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는 아찔한 순간들이 있어. 자신이 얼마나 많은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에 비겁했고 무능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야. 그건 삶이 변화하는 순간들로 죽음이나 종교적인 각성처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단다. 내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으면서 으스스 한기가 들었어. 정원을 바라보는데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더군. 내가 뭘 느꼈냐고?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것. 모든 게 나한테 달려 있다는 것. 내 인생에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호박이 저절로 넝쿨째 굴러 들어오길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3월 23일 방송>


2. 기독교회의 유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구체적인 한 시대를 살았던 신앙의 선진들의 삶과 신앙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과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교리화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세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인성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 큰 소리로 외쳐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순간에 더 이상 인간적인 성품을 다 사라지고 오직 영적인 존재로써만 남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야만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이 완전무결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한, 불완전하고 문제투성이가 될 수 밖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다 함께 존재한다는 신앙이 흔들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신앙고백인 <사도 신조>를 비롯해서, <니케야 신조>나 <아타나시아 신조> 등이 교리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신앙하는 모습은 연약합니다.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성경의 중심 주제를 정리한 신학이나 교리가 절실한 것입니다. 신학이나 건강한 교리보다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없을지 모릅니다. 창조신앙과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누가 넘어트리겠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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