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묵상자료는 매일 게제됩니다.

토요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4월 23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Sat, 23 Apr 2011 03:25:03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628호(2011.04.23. 토요일)

시편 53:04-06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본문 로마서 8:01-11

1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찬송 175장 <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

위 찬송을 직접 듣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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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격이 맞으면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더 정확이 얘기하자면 성격보다는 취향이라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같은지 최소한 싫어하는 것이라도 같아야, 만났을 때도 즐겁기 마련인데요. 흥미로운 것은 생각지도 못한 아주 사소한 것에서 취향의 차이가 들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자문하는 남자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 하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스위스 작가 알랭드 보퉁이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 등장하는 이 남자는, 그런 자문이 결코 자잘한 게 아니라고 반박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건,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빵에 버터를 바르는 모습을 보고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고, 구두 고르는 것을 보면서 갸우뚱해 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옳고 그른 걸 따지기 전에 참기 힘들다는 걸 텐데요. 그래서 취향의 차이를 느끼는 순간, 만나기를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테고, 반대로 나와 다른 취향이라는 게 신기해서 만남을 그러다가는 또 다시 갈등과 충돌 대립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되고 보면, 취향의 차이라는 게 결코 자잘한 문제가 아니라는, 알랭드 보퉁의 말이 맞는 셈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철학자 삐에르 브로드웨이의 말에 따르면요, “취향이라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의 원리”입니다. 취향을 통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 수도 있고요, 또 다른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구분지어 주는 현실적인 증거가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의식하게 되고 강렬하게 작용하는 게 취향의 차이인 겁니다. 게다가 음악이나 미술 음식 문화에 대한 취향 차이는 아주 보수적이고 견고해서, 웬만해선 잘 바뀌지 않는데다가, 자신의 취향이 옳고 이롭다는 생각에, 상대방에게 강요하기도 쉽고요, 심지어는 계급을 구분하는 장벽이 될 수도 있는데요. 브로드웨이가 “미적 취향이란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지만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취향이 달라서 또 다행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취향이 모두 같다면, 그거야 말로 참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고 걱정스러운 상황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3월 30일 방송>


2. 육과 영, 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양면성이면서, 동시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불편한 친구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육은 보이는 자신, 영은 보이지 않는 자신이라는 점에서 서로 좋아할 수도 있으련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절). 이렇듯 영의 생각을 따르기 위해서, 육신과 함께 살면서도 육을 미워하고 거부하고 벗어던지려고 한다면, 부끄럽고 초라하게 살고 계시는 자기 근원이신 부모님을 모른 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격 장애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자고 인격 파탄 자가 될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육과 영, 문제는 이 둘을 무작정 끌어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현실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먼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육은 오래 전에 타락한 몸이고, 그래서 그 육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 뿐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을 따라 살려는 영은 우리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떨쳐버릴 수 없는 육의 생각을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도록 하게 하자고 말입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던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믿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중략>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절).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 주님을 오늘도 바라보는 것, 그 보다 더 큰 힘은 없겠지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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