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14호 (2010.06.13.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시편 109:14-18
14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17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본문 누가복음 0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어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찬송 302장 <주님께 귀한 것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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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년아, 일어나라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타인에게 해 줄 수 최고의 일은 그를 기억해 주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역사를 빛낸 위대한 남자와 여자들의 한 마디를 새롭게 돌아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한 마디> 오늘은 “인간이 타인에게 해 줄 수 최고의 일은, 그를 기억해 주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한 마디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모두 모입니다. 장례식이나 추도식에서, 생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추모하지요. 그런 기억과 추모는 그 이후로도 해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마다 다시금 이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도 거듭해서 기억됩니다.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있는 동안, 그는 세상을 떠나고도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닌 셈이지요.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현존하는 존재인 셈입니다. 그러니 기억의 위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가요. 죽은 사람을 살게 하는, 떠나간 사람을 머리맡에 머물게 하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물론 꼭 세상을 떠나고 없는 사람만의 일일까요?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서 서로를 가장 열렬히 기억하는 형태가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이란 한 시도 그 사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 종일 기억나고 또 기억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살아서 가장 좋은 것도, 죽어서 가장 위대한 것도,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것이겠지요. 그런 뜻에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사랑하는 이들에서부터, 직접 아는 얼굴은 아니어도 그 죽음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까지, 찬찬히 기억해 봅니다. 이런 기억의 순간이야말로, 타인을 위해 최고의 일을 하는 거라는 빅토르 위고의 기억하면서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6월 6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절기는 교회의 절기입니다. 신앙 성장을 목표로 배우고 익히는 때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생활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역할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지도하는 일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말씀 속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신앙하는 의미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절망하는 여인에게 주님이 다가 가셨습니다(11-13절).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문제투성이일 뿐 아니라,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이런 세상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연민이란 “함께 나누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기쁨이든 슬픔이든 함께 나누어 가지려는 마음이 연민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과부로, 지금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며 기쁨이었던 외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집을 나선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의 슬픔과 절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절망과 슬픔에 붙잡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절망과 슬픔을 이겨낼 새로운 은총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부르셨습니다(14절).
우리들의 삶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게 된 과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일이 하필 이 여인에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명한 대답을 잘 알지 못합니다. 왜 의인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지 말입니다. 더 나아가 왜 아프리카나 아이티의 아이들이 굶주림에 죽어가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십니다(요 11:4).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슬픔을 겪을 때, 우리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과부의 독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외에 다른 대답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망과 슬픔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청년은 일어나야 합니다. 어머니와 세상을 위해서(15-16절).
우리 주님은 청년을 절망 속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 그는 일어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살려내신 주님의 원대한 뜻입니다. 나인성 청년에게 주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청년은 일어났고, 어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런 기적이 오늘 우리 젊은이들에게 일어난다면, 무엇을 위해 살라는 뜻일까요? 그는 반드시 홀로된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신 세상을 위해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청년을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들은 우리 역사의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경쟁력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청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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