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19호(2010.06.18. 금요일)

시편 111:01-04

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3 그 행사(行事)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4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본문 마태복음 14:22-3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 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通知)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찬송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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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이 기억나도록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의 시대에 보내드리는 나와 당신 우리 자신의 심리를 알면서, 더욱 행복해 지자는 <행복한 심리학>입니다.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아 놀기 시작하지요. 아빠는 장난감을 어서 돌려주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아들은 싫다면서 왜 돌려줘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네가 돌려주지 않으면, 네 친구가 슬퍼하지 않아.” 아들은 대답하지요. “친구가 슬퍼하든 말든 난 상관없어요.” 이럴 때, 아빠는 도덕심 형성의 기초단계에 있을 아들에게 뭐라 해야 할까요? 쿼터 바이어트는 [도대체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책을 쓴 독일 철학자입니다. 그는 앞서 들려드린 일명 <놀이터에서의 대화>를 통해서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왜 사람들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이끌어내지요. 가령 아이가 친구가 슬퍼하든 말든 난 상관없어요. 이렇게 말할 때, 그건 나쁜 거야 옳지 않은 거야. 무조건 나쁘다는 건 실은 설득력이 퍽 약합니다. 설득력이 보다 분명하고 강한 타이름은 “얼마 전에 여기서 어떤 형이 네 장난감 양동이 빼앗았을 때, 너도 슬펐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 그러니까 너도 친구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도대체 왜 도덕적이야 하는가에 대한 쿼터의 결론은, “당신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도덕적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막고, 그런 방식으로 나도 안전할 수 있으니까” 지요. 만약 무도덕적자가 도대체 내가 왜 도덕적이어야 합니까? 이렇게 따져 묻는다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나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뽑은 이들이 앞으로 왜 정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답도 되겠지요. 그들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을 경우, 그 피해가 그들이 나쁜 사람이 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까지 피해가 직접 오기 때문이라는 점. 좋은 정치 역할에 대한 기대와 함께 깊이 기억해 둬야 할 철학적인 결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6월 3일 방송>


2. 요즘 우리나라에도 크루즈 여행 상품이 선전되고 있습니다. 배의 크기나 힘 때문인지 매우 편안하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위에서 밤을 보내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둘러서 제자들을 배를 타고 가게 하시고, 당신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그런 배경을 말씀합니다. 문제는 캄캄한 밤중에 생겼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어두움은 문제가 생겨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기도하러 가신 주님은 오시지 않았는데, 바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자, 제자들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도가 일어나는 바다위로 주님이 걸어오시는데,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고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호기심이 베드로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부탁을 드리고, 겁 없이 물위로 뛰어 내립니다. 놀랍게도 베드로도 물위로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결을 보게 되자 겁을 먹게 되고 물에 빠져들어 가게 되어 주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누가 보아도 주님만 바라보아라.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 는 식으로 설교할 수 있거나 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에는 언제나 허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주님을 본다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눈으로 주님을 보는 것이란 약점이 많습니다. 베드로처럼 언제든 주변 환경도 바라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정답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듣고 기억하는 일이며, 그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보다 더 좋은 신앙하는 방법은 없을지 모릅니다. 헬라어 아남네시스(αναμνησις)라는 말은 “생각하다, 기억하다”가 아니라, 수동태로 “생각나게 하다, 기억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가장 먼저 드릴 기도말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 어제의 <오병이어 교회>는 <팔복교회>로 수정합니다. 묵상식구이신 이미옥 목사님께서 강습회 진행팀에게 저녁을 사주셔서 큰 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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