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묵상자료는 매일 게제됩니다.

---------- [ Original Message ] ----------

Subject: 4월 26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Tue, 26 Apr 2011 04:53:54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631호 (2011.04.26. 화요일)

시편 55:01-03

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3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성경 요한복음 14:15-3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誡命)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平安)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찬송 169장 <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

위 찬송을 직접 듣고자 하시면 아래를 클릭하시고

http://www.holybible.or.kr/HYMN/cgi/hymnftxt.php?VR=HYMN&DN=169&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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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디선가 사람한테는 매일 일정한 양의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풀어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쉽게 말해서 누구나 자신이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 원초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요. 대부분의 경우 그 자기 표현의 수단은 말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고나서 후련할 때가 있고, 오히려 안 한 것보다 더 찜찜하고 심지어 불쾌해 질 때도 있는데, 바로 내가 말하는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이 오해를 하더니, 날개를 달고 멀리멀리 내 말이 날아가 버릴 때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알아듣는 시늉만 하고, 제 멋대로 해석해 버린 것 같은 그런 씁쓸한 느낌인데요. 그럴 때면 “쑥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너나들이”가 간절하게 그리워지지요. 서로 너니 나니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네는 행동, 혹은 그런 사이인 너나들이. 한자로는 친구라고 하고 지기라고 하고, 또 다른 우리말로는 벗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요. 하지만 살면서 진정한 벗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는 지기를 얻었을 때의 벅찬 포부를, 이렇게 계획했을 정도였지요.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내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100번 달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며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 지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참 벗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눈에 보이듯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런 묘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이를 두고 이런 벗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이덕무의 글에는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이덕무의 벗이었던 박제가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요. “벗이라는 것은 반드시 술잔을 머금고 은근히 대접하여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는 것만은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절로 말하게 되는 것, 이 두 가지에서 그 사귐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없이 마주보고 있어도 좋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말하고 싶은 것을 절로 말하게 하는 깊디깊은 너나들이. 그 출발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존중이었을 겁니다. 참 친구라는 말처럼 흔한 것이 없는데요. 생각해보면 나에게 호기심도 존중감도 없는 사람이 무슨 벗이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호기심도 관심도 두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3월 29일 방송>


2. 하늘 아버지 집에 우리들이 거할 처소를 준비하시려는 주님은, 감사하게도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당신 대신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성령님에 대한 말씀은 구약에도 자주 나오고 있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분명한 이름을 가진 성령님에 관한 말씀은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보혜사 성령님 말고도 다른 성령님이 계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니면 모든 성령님이 다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이해해도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묵상은 그냥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소개해 주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실 분이라고 일러주십니다(16절). 그러니까 적어도 주님 안에 살고자 하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동행하신다는 분명한 진리를 의지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은 주님에 대해서 가르치실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26절).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을 바로 알고 싶어 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싶다면, 당연히 보혜사 성령님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구하고 찾기 전에 벌써 우리를 감화 감동시키시는 분으로 항상 곁에 계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된 놀라운 사실 앞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오늘은 대심방을 하루 쉬고 신학교를 위한 바자회에 운전수와 짐꾼으로 따라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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