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ject: 7월 5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Mon, 05 Jul 2010 04:51:26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 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336호 (2010.07.05. 월요일)

시편 117:01-02

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본문 마태복음 19:13-23

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부자 청년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찬송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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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국을 마음에 품기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의 시대에 보내드리는 나와 당신 우리 자신의 심리를 알면서, 더욱 행복해 지자는 <행복한 심리학> 시간입니다.

종교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였고, 특히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채색으로 유명한 화가여서일까요?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 H. Rouault)의 그림은 어딘가 사람을 경건케 합니다. 선 굵은 윤곽과 강열한 색채들에선 등장인물들의 고요하면서도 강열한 내면의 깊이가 느껴지지요. 루오는 특히 당대에 유행했던 유파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거장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그런 조르주 루오는 생전에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는데요. “나는 망망대해에 미미한 먼지, 바람에 씻기우는 가련한 선원, 그러나 어두운 암흑 속에서조차 성스러운 평화와 빛을 사랑하노라.” 루오처럼 때로는 자신이 더 없이 미미한 먼지같이 느껴질 때가 있지요.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의 책 [비범성의 발견]에 의하면, 갓난아기들은 하루에 다섯 가지의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들이 부정적인 느낌으로 채워지면, 그 아이는 9개월 후에는 1,300여개, 5년 후에는 2만개가 넘는 부정적인 경험을 하는 셈이지요. 긍정적인 아이들보다 2만개가 넘는 인생의 방해거리를 갖는다는 셈입니다. 두 세 개만 있어도 인생이 순탄치 않겠지만, 2만개라니? 루오는 자신을 망망대해의 미미한 먼지, 바람에 씻기우는 가련한 선원이라면서도, 그런 미미함에서조차 성스러운 평화와 빛을 사랑하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바흐만의 평화나 사랑 희망이라는 감정을 품을 줄 알면, 누구나 미미한 먼지가 아닌 거대한 존재일 수 있다. 이게 바로 루오나 하워드 가드너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6월 18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천국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천국의 주인공들이라는 말씀과(13-15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 관한 말씀(16-23절)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어린이다움> 이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호기심, 천진함, 겸손함 그리고 다른 이를 기쁘게 하고 싶음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해맑은 어린이를 보셨을 것입니다. 젊은 엄마 등에 업혀서 사뭇 신기한 눈망울을 굴리다가, 누군가 미소 띤 얼굴로 눈이 마주치면 금세 엄마 등에 머리를 숨기는 아이 말입니다. 어린 아이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것과 같습니다. 눈과 입술 그 포동포동한 손 등과 종아리,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어린 아이는 3살 때까지 효도를 다 해버렸다고 선언했는지 모릅니다. 엄마와 아빠에게 삶의 기쁨과 위안 그리고 소망을 충분히 안겨다 주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심리학에서는 <어린애처럼>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대체로 4-6살 때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가령 자기중심성, 안하무인, 유치함, 분별력 없음, 대장노릇하기 등 문제도 없지 않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어린 아이란, 3살까지의 아이를 얘기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의 기독자들에게서 천국에 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천국이 자리 잡기에는 너무 많은 허접스런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고대가>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이 고대가의 배경은 슬프고 답답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먼 옛날의 희망이었던 것들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힘든 노동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부터도 해방되었고요. 그래서 더 이상 <고대가>를 부르지 않아도 될 만한 그런 처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악해지고 빗나가버린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서 절망감을 찾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며칠 전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목숨을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가 절망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 절망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인기를 누리면서도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 이해받고 싶음, 존중받고 싶음, 허물을 감싸 주는 평안함이 너무도 절실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천국이 그리웠을지도 모릅니다. 슬프게도 그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모르고 헤매며 살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묵상식구 김광중목사님(광주제일교회)은 열흘 예정으로 중국선교여행에 참가하십니다. 많은 감격을 안고서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마산 베델강습회에 참가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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