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33호(2010.07.02. 금요일)
시편 116:05-11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11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본문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同官)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절하며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찬송 339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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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예는 원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이다. 고통을 느낀다면 그는 자유인이다.” 며칠 전, [녹색 평론]의 발행인이 쓴 이런 인상적인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런 구절은 어린이들의 지각 발달 과정과도 참 닮았어요. 갓난아이들은 자신의 손이나 발가락을 가지고도 참 즐겁게 잘 놀 수 있습니다. 아직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자기 몸의 일부라는 생각조차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가락 발가락조차도, 흔들면 소리가 나는 딸랑이처럼 흥미로운 장난감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딘가에 발가락을 찌어서 아프거나, 뜨거운 것을 만져서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그 아픔을 통해서 내 손과 발이 장난감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라는 것을 깨우친다고 하지요. 만져서 조금 간지럽거나 즐거울 때는 장난감과 자기 몸의 경계를 인식할 수 없지만, 고통스러울 때 그것이 자신의 일부라는 걸 절실히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갓난아이들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자각하고, 좀 더 자라서는 여러 일상의 번거로움 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자아를 자각해 나가지요. 이렇게 성숙을 위해서는 고통이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이라는 단어에 통증을 더해서, <성장통>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아프다 힘들다 화가 난다, 그런 감정들을 일단은 피하고 싶어 하지요. 또 그런 감정을 투덜거림이나 응석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투덜거림은, 사실은 투정이나 응석과는 정 반대되는 감정인 셈이지요. 자유인 어른이어서 느끼는 불편과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피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환대해 주어야 할 통증도 있는 거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6월 8일 방송>
2. 누군가의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매 순간 잘못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 생각하거나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되돌아보면 어김없이 죄악 한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뜬금없이 “형제가 내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거듭 묻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용서의 횟수가 궁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당시의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다고 하니까, 베드로의 두 번째 물음은 그 보다는 훨씬 더 용서한 경우이니까 칭찬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는 게 주석가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귀를 의심케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며, 어쩌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용서해 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말도 안 돼!”라는 말이 새어나올 것 같습니다. 단 한번 용서도 하기 힘든데 세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니.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무한정으로 용서해 주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말씀을 반복합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신다.” 저는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류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며 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시간이 허락한다면 퀴즈놀이처럼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한 번 해볼 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회개는 누가 하나요?” “용서는 누가 하나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찬송은 누가 하고, 누가 받나요?” “말씀은 누가 하고, 누가 듣나요?” “은혜는 누가 구하고, 누가 베푸나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란 능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것이어야 함을 깨닫지 않는지요?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는 우리들 인간에게 왜 그토록 많은 용서를 하라고 명령하실까요? 그것은 불가능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려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치 율법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갈 3:24). 불가능을 깨닫게 될 때, 참된 가능에로 눈을 뜰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 사랑할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드릴 기도 중의 한 구절이기를 바랍니다.
3. 오늘 오전에 제 강의는 끝납니다. 저녁에는 “말씀과 함께 한 세월 3,333일” 이란 주제로 묵상식구들이 스칸디나비아클럽에서 모입니다. 반가운 만남이 되리라 기대하며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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