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30호 (2010.06.29. 화요일)

시편 115:09-13

9 이스라엘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본문 마태복음 17:22-27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이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로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찬송 491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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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전세를 내신 예수님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림도 실생활과 같아서 지체 없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빛낸 위대한 남자와 여자들의 한 마디를 새롭게 돌아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한 마디>, 오늘은 파빌로 피카소의 “그림도 실생활과 같아서 지체 없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한 마디입니다.

어느 날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나 계획이 번쩍 머리를 스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즉시 메모를 해두고 실천에 옮겨야 하지요. 그래야 번쩍 떠오를 때의 열의나 자신감을 실제 일이나 행동에 훨씬 쉽게 반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일 때가 많지요. 모처럼의 좋은 생각이나 계획들에서도 마치 아무 쓸모없고 허황된 상상에서 빠져나오듯, 그냥 빠져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정작 그 생각이나 계획이 실제로 필요할 땐, 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애를 먹기도 하지요. 피카소는 평생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작품을 쏟아냈습니다. 회화에서부터 판화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다양했지요. 5만여 점에 이르는 작품 숫자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였습니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흔히 이미 그 능력이 소진되거나 쉽게 탈진하기도 하지요. 그에 비하면 피카소는 천재성을 참으로 오래 한결같이 유지했던 화가였습니다. 그 비결이 바로 그의 한 마디 “그림도 실생활과 같아서 지체 없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말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대상이나 주제가 떠오르면, 즉시 작품에 착수하고 완성해 낸다는 그 지체 없음이, 바로 그의 천재성의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화가가 아닌 생활인으로써 생각해 봅니다. 좀 더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일상을 위해선, 때론 경박과 허술 미완성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피카소식의 지체 없는 실천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야 할 줄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년 6월 20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제2차 수난 예고의 말씀과(22-23절), 밀린 성전 세를 내신 일화를(24-27절) 소개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1차 수난 예고의 말씀을 간단히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수난 예고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너무 낯선 주제여서 어리둥절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심히 근심했다는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수난 예고가 두 번씩이나 되풀이 되자 그것이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겼으리라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의식이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면, 새로운 발전과 창조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묵상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주제, 성전 세를 내신 일화입니다. 성전 세는 모든 유대 남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으로 그 액수는 반세겔이었습니다. 이 성전 세는 성전의 유지 보수를 위해서 내는 세금으로 자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문처럼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징수원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남자는 13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bar mitzvah)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이때부터는 성인(成人)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장가도 갈 수 있고, 성전세도 바쳐야 하고 명절에는 성전예배에 참가할 의무가 지워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이나 제자들 역시 당연히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당연히 세가 면제되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해서 성전 세를 내겠다고 하시고, 바다에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아, 그 고기 입에 담긴 한 세겔을 베드로의 것과 함께 내셨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기 위해서 바치는 성전 세는 강제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발적인 참여를 깨닫기 까지는 한시적이나마 강제적인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몇 해가 걸릴까요? 적어도 그 날이 될 때까지는 사랑의 강제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기 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되풀이해서 훈련을 시켜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은 실행에 옮길 때까지 반복될 사랑의 잔소리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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