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29호 (2010.06.28. 월요일)

시편 115:04-08

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 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본문 마태복음 17:14-21

3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悖逆)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찬송 344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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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가진 믿음은 무엇인가?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헤르만 헷세는 한 회고록에서 “나는 커서 시인이 되던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내 나이 13살 때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그의 행적을 보면요, 그 말이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라, 정말 진솔한 고백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그저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 했지요. 14살의 조숙하고도 예민한 그를 엄격한 수도원 부속학교에 입학시켜서 그 당시로써는 가장 안전한 미래였던 종교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지요. 그런데 헷세는 채 1년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헤르만 헷세의 공식적인 교육 경력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졸업장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급수까지도 정해진 지금 기준으로 보면, 헤르만 헷세의 고등교육 정도는 바닥인 셈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난 뒤에, 시계공장 그리고 서점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헷세는 틈틈이 책을 읽고 시를 써나갔지요. 그제서야 비로소 작가로써의 공부가 시작된 겁니다. 나중에 그는 짧은 학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 유명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라는 책을 펴냈지요.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써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그 책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보면, 헤르만 헷세가 공부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가 기계적인 틀에 맞춰져 개발되는 것을 가장 견딜 수 없어 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지요. 대신에 그는 학교를 벗어난 뒤에 평생토록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또 익혔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그가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였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6월 17일 방송>


2. 변모산 체험을 한 제자들과 주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병들고 배고프며 문제투성이인 세상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보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하소연합니다. 간질병을 앓는 아들로 인해서 고생하는 식구들의 눈물겨운 얘기가 나옵니다.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듣는 일은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어서 측은지심이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호스피스 봉사활동에 여러 해를 수고한 교우가 있었습니다. 처음 몇 해는 환자들의 말에 귀를 기우려 들으면서 함께 울고 웃었는데, 몇 년을 되풀이 하는 가운데 무감각해진 자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건성으로 흘려듣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짜증 섞인 말씀을 하신 배경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사족을 붙여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화를 내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남자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던 나머지 아홉 제자들을 먼저 만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안수도 하고 열정적으로 기도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얘기를 듣자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질병 환자를 불러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무력함에 대해서 묻습니다. 왜 우리는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흔히 믿음을 말할 때, 우리들 인간의 편에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믿는다는 말이지요. 내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무엇을 믿느냐는 대목에서 말입니다. 믿음의 대상이나 믿음의 내용에 대한 차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자신들의 판단이나 의지에 근거를 둔 그 어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식을 믿는다고 하며, 성공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믿음의 뿌리나 확률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인식이나 경험 등에 기초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믿음을 신념이라는 말로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그 내용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나, 약속하신 말씀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 역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뿐, 정작 믿음은 희미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신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위에 근거를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말씀위에 굳게 서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3.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서울 베델강습회에 참가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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