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ject: 6월 26일의 묵상자료 입니다. Date: Sat, 26 Jun 2010 05:18:15 +0900 (KST)

From: "박성완" lutherfriend@hanmail.netTo: "정태한" bigguy05@paran.com

묵상자료 3327호 (2010.06.26. 토요일)

시편 114:05-08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이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6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본문 마태복음 17:01-13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變形)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엘리야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草幕)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忽然)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엘리야요한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찬송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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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모산의 신비 체험이 주는 교훈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간혹 내 개인의 취향과 정당한 비평을 뒤섞어버리곤 합니다. 작가 장정일은 그런 식의 인상주의 비평을 지적하면서, 한 음악평론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를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잠깐 미안한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경배하는 첼리스트를 나 혼자만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 미안함은 씻은 듯이 가셔져 홀가분해졌다. 장애물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 첼로를 든 채 뛰다시피 자리로 달려간 그는 미쳐 엉덩이가 자리에 고정되기도 전에 활을 그었다. 그것은 서커스 묘기의 극치였다.” 그렇게 한 음악 평론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활기 넘치는 연주회 입장모습, 바삐 첫 활을 긋는 모습을 서커스 묘기 같다고 단언해 버립니다. 대신에 그와는 반대로 느리고 힘없이 입장해서 한참 고요하게 앉아 있다가 활을 긋는 다른 연주자에게는 극찬을 보내지요. 작가 장 정일은 이 평론이 내용보다는 “나는 너무 씩씩하게 입장해서 의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하는 사람은 싫다.” 라고 자신의 취향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썼습니다. 합리적인 내용분석 대신에, 취향이 앞서고 있다고 본 거지요. 그런데 인상주의 비평의 허점을 지적한 글 속에, 얼핏 우리가 자주하는 실수도 엿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유 같은 것은 밝히지 않고도, 그냥 싫다, 그냥 좋다, 이렇게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곤 했지요. 어린 마음과 그런 단순 경쾌한 대답은 꽤 잘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어법이 좀 불편해 지기 시작하지요. 한참 작아져버린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기 어색합니다. 그런걸 보면 적어도 내 취향이 아니다. 그냥 싫다는 말은, 어른다운 어법은 아니란 게 확실한 것 같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6월 16일 방송>


2. 감격스럽게도 제가 변모 산이라고 알려진 다볼 산을 올랐습니다. 1983년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첫 번 이스라엘 순례 때는 들리지 못했던 곳이어서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3대 거장이 회동(會同)했던 역사적인 자리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산의 모양새도 신비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전라도 진안에 있는 마이산처럼 평지에서 우뚝 솟아오른 듯 한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 주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12 제자들 중에서도 3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이 이 장면을 비몽사몽간에 볼 수 있었고, 빛난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변모산은 신비체험의 학습장이었는지 모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이렇듯 특별한 이들에게는 일어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입니까? 12제자들 중에서 4분의1 밖에 안 되는 단 3사람에게만 그런 특별한 일이 나타났으니까 말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아직까지 이런 유의 신비체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큰 위로의 말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해처럼 얼굴이 빛날 뿐 아니라, 수천 년 전의 위인들과 만나시는 우리 주님의 변모기사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이심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런 신비함은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오래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들 세 제자들은 이때의 경험을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는 힘이 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변모 산의 기사(記事)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땅보다 언제나 높은 하나님의 섭리를 눈뜨게 하는 각성제(覺醒劑)로 작용할 테니까 말입니다.

한가지, 이 본문에 대한 언급이 고작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 는 말씀뿐이고 보니, 제자들이 이 경험을 왜 함구(緘口)했을까도, 세 분의 만나서 나눈 대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을 베드로가 어떻게 꾹 눌러 참았을까도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더 이상 추측하거나 소설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도마 복음서>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들 인간의 관심사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관심사를 말씀하는 내용인 때문입니다. 물론 궁금증을 참는 것은, 더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으면 합니다.


3. 혹시 묵상식구 중에 미용사가 계십니까? 갑작스럽게 미용사 한 분이 필요해졌습니다. 제가 약속했던 선교지에 파송할 미용사 두 분이 사정이 생긴 때문입니다. 오는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중국에서 미용봉사선교에 참가하실 뜻이 있는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010-3936-9504).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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