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326호(2010.06.25. 금요일)

시편 114:01-04

1 이스라엘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짐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 유다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4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본문 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를 따르는 길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재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찬송 519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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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화가들에게 꽃병 속의 꽃이나, 사과 같은 정물화 멋진 풍경화는, 언제나 안전한 상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벽에 무언가를 장식하지 않으면 휑해 보일만큼의 이는 큰 집 큰 방을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품이었지요. 또 아름다운 여인이나 신화나 성서의 여인 좋은 그림 소재들이었습니다. 영웅이나 미인은 영원한 호기심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안전한 상품 대신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화가들은 대체로 가난했고, 살아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지요. 화가 박수근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박수근은 평범한 이웃들을, 그것도 <빨래하는 여인>, <아이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들>, <쪼그리고 앉아 물건을 파는 할머니>를 즐겨 그렸습니다. 집 밖만 나서면 우리도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굳이 사서 벽에 걸어둘 필요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지요. 화가 박수근의 아들은 “만약 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셨다면, 노숙자를 그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사람은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들이었다는 말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했습니다. 미술 평론가 유홍준은 “박수근은 그 당시에 아무도 그리지 않는 나무와 여인 빨래터와 노상(路商)들을 그림으로써, 예술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음을 입증하였다. 예술이나 정치나 우리의 옆구리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라고 평했습니다. 이렇게 박수근은 그림을 사 줄 사람들의 마음에 들 그림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들, 키 작은 사람들의 조용하지만 강인한 아름다움을 그려냈습니다. 그런 일상속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화가의 그런 믿음에 점차 사람들은 설득되기 시작했지요. 이제 박수근의 전시회가 열리면, 그 앞에는 늘 긴 줄이 서곤 합니다. 그럴 때 보면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설득이다.” 싶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6월 11일 방송>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수난 예고는, 공관복음서(마, 막, 눅) 모두에서 세 번씩이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사건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인 본문은 벳새다 광야를 중심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몇 개의 떡으로 4천명, 5천명 등을 먹이는 그런 분위기에서 말씀하고 있고, 두 번째 수난 예고는 변모 산의 사건 후에(마 17:1-23),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길에 말씀하십니다(마 20:1-19). 각각 그 배경이 다르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길은 문선명이 주장(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되고 예정된 하나님의 뜻(βουλη)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순진한 기독교인들을 어지럽게 하는 거짓 교사들의 농간을 알았으면 해서입니다.

놀라운 기적 사건들과 그 정반대에 서있는 십자가의 길, 제자들은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눈치를 챈 때문일까요? 만일 저를 따르는 제자가 있다면, 현대판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설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단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게 사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는지요? 아버지의 길이나 자식의 길을 걷는 것, 스승의 길과 지도자의 길을 걷는 등의 도덕적인 이야기 곧 완덕(完德)의 길을 걷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는 자기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구체적인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예수의 흔적을 짊어지고 사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다음 주 금요일(7월 2일)은 묵상 3,333호가 배달되는 날입니다. “묵상 3,333일의 만남”이란 주제로 간단한 자축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참석을 원하시면 이석윤장로님께 연락바라며(☎010-2632-1203), 7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국립의료원 내 스칸디나비아 클럽(한국 최초의 뷔페식당)에서 식사와 감사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방명록에 이름과 글을 남기며, 회비는 10,000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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